mori in progress: 까마귀의 모음 1집

임유청(2017)

mori in progress: 까마귀의 모음 1집

사람들은 종종 "세상에서 한 도시를 골라 살 수 있다면 어디에 살고 싶으냐"는 질문을 하곤 하는데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꼭 베를린을 꼽는다. 베를린은 아니었지만, 독일에 6개월 정도 살았던 적도 있고, 베를린에서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보낸 기억도 있어 어쩔 수 없다. 아이슬란드나 교토처럼 내가 좋아하는 다른 도시와 그 도시에서 보낸 시간에 대한 여행책이 많은 요즘이다. 그래도 그런 책들을 일부러 찾아 읽은 적은 없었는데 베를린에서 한 달이라고 하니 읽고 싶어졌다. 한 달을 꼭 채운 30개의 꼭지. 이 책은 앞에서 말했던 그런 책(그러니까 적당히 예쁜 사진들이 컬러로 가득가득 들어있는 책)들과 다르다.

이 책은 신경질로 시작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여행기인데 "신경질이 났다"며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에 대한 설렘보다는 비행기에 대한 불안감과 엉망인 컨디션을 얘기한다. 어쩌면 여행이란게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보통 새벽부터 공항에 가야 해 컨디션이 좋을 리 만무하다. 잠은 못 잤는데 짐은 무겁고, 기내용 짐 무게는 괜찮을지, 체크인에 늦진 않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또 여행엔 남에게 말하기 조금 남부끄러운 것들, 그러니까 엄마가 들려 보낸 고추장 같은 것들이 '쿨'하지 않게 끼어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지난 여행은 보통 좋은 기억으로 남아 버린다. 나도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그래서 더 잘 안다. 그리고 여행 이야기를 남에게 꺼낼 때면 왜곡된 기억이 괜히 확장되고, 수식어가 자꾸 덧붙는 것 또한 잘 안다. 그래서 이 책이 좋은 기억으로만 가득 찬 비현실적인 여행기가 아니라서 좋았다.

현실성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글쓴이가 던지는 문장들이다. 글쓴이는 그때그때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말한다. 이상하고, 좋아하고, 불편하고, 빈정이 상하고, 흐뭇하고, 마음이 놓이고, 보기 좋고, 궁금하고,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고. 글을 읽다 보면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그렇다고 과도한 감상에 빠지지 않고, 적당한 농담과 자기 성찰로 쏙 빠져나온다.

솔직한 목소리를 따라 읽고 있자면 마치 내가 베를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 같단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왜 그런가 보니 이 책에는 솔직한 감정만큼이나 많은 감각이 살아있다. 건물의 모양이나, 광장의 냄새, 소리, 음식의 맛... 특정 장소를 얘기할 때도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바라보고 찬찬히 설명해준다. 음식과 술 이야기가 특히 많은데 고추장 얘기로 책이 괜히 시작한 게 아니다. 중간중간 많이도 먹고 마신다. '우베'가 해준 음식들, 짬뽕, 쌀국수, 맥주와 칵테일. 여행기의 마지막마저도 한국에서 먹는 콩나물국밥으로 끝나니 참 완벽한 수미상관식 구성이라 할 수 있겠다.

앞에선 이 책을 굳이 분류하자면 여행기라고 얘기했지만, 사실 여행기라기엔 조금 더 개인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 베를린에서 또 가장 좋아하는 곳은 마지막에 실려있는 소설의 배경으로도 잠깐 나오는 (것 같은)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의 벽과 그림 그리고 많은 사람보다는 그 옆 강가에 앉아 강을 하염없이 보고 있는걸 좋아한다. 이 책을 읽는 경험이 약간 그랬다. 독일에 사는 친구 집에 한 달을 머물며 먹고, 마시고, 본 이야기를 출발과정부터 차근차근 옆에서 빗겨보는 느낌이 들었다. 베를린의 주요 관광지들을 보는 게 아니라 여러 장소를 다니는 글쓴이를 옆에서 지켜보는 감각.

책에서 장소에 대한 설명과 함께 찍은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사진들은 작게 작게 들어가있다. "정말 맘에 드는 것들엔 아예 카메라를 들이 대지도 않았다."는 말처럼 정말 좋았던 건 글에서도 숨겼을 것 같단 생각도 들었다. 여기선 여행지의 정보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베를린에 여행을 갈 예정이라 정보를 찾는 사람보단 조금 긴 여행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사람이나 글쓴이가 궁금한 사람이 이 책을 더 재밌게 읽을 것 같다.

아니면 같이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이 책을 읽어도 좋겠다. "베를린으로 간다"는 첫 문장에 몸을 같이 실어 3D 지도와 좁은 이코노미석을 떠올려도 보고, 같이 짜증도 내보고, 웃어도 보면 출국부터 귀국까지 한 달간 글쓴이가 보낸 시간에 몸담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B-side란 이름 아래 붙어있는 소설을 어떻게 읽으면 좋겠냐고 글쓴이가 개인적으로 물어보기도 했는데 그냥 이 책에 실려있는 순서대로, 제일 마지막에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밀크커피나, 약을 파는 남자나, 포스터 같은 것들에서 방금 읽었던 베를린에서의 한 달과 글쓴이의 목소리 같은 게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 재밌기도 해서 소설을 읽기에 더 좋았다.

#에세이